연금경제

‘예금의 나라’ 일본에서 뒤집힌 자산 순위…노후자금의 역할이 달라졌다

주식·펀드 679조엔으로 보험·연금 첫 추월…주가 상승과 신NISA 뒤에 숨은 일본 가계의 자산관리 변화

홍태준 기자

오랫동안 일본 가계의 자산관리에는 익숙한 공식이 있었습니다. 벌어들인 돈은 은행에 넣고, 노후와 만일의 위험은 보험과 연금으로 대비하는 방식입니다. 투자보다 저축과 보유에 익숙한 자산구조였습니다.

그런 일본에서 상징적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일본은행의 자금순환통계를 바탕으로 한 집계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일본 가계가 보유한 주식·투자신탁은 590조엔으로 보험·연금 등 579조엔을 처음 넘어섰습니다. 6월 말에는 주식·투자신탁이 678조9,608억엔까지 늘어난 반면 보험·연금은 585조8,334억엔으로 집계돼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숫자만 보면 일본 가계가 예금과 보험을 버리고 주식시장으로 대거 이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변화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정말 돈을 옮긴 것일까요, 아니면 가지고 있던 투자자산의 가격이 오른 것일까요.

 

보험을 깨고 주식을 샀다? 숫자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6월 말 일본 가계의 주식·투자신탁 보유액은 전년 동기보다 44% 증가했습니다. 14분기 연속 증가입니다. 같은 기간 보험·연금 자산 증가율은 3%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자산의 잔액 증가와 신규 자금의 유입은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6월 하순 일본 주식시장이 크게 오르면서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주식의 평가액이 함께 상승했습니다. 엔화 약세도 해외주식과 해외펀드 등 외화자산을 엔화로 환산한 평가액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됐습니다. 즉 679조엔이라는 숫자가 전부 새로 주식을 사들인 돈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제 자금 이동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가격 변동을 제외한 올해 4~6월 주식·투자신탁 순유입액은 3조7,000억엔으로 2분기 연속 3조엔을 넘어섰습니다. 시장 상승에 따른 평가이익과 함께 가계가 투자자산으로 자금을 넣는 흐름도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일본 가계의 변화는 단순히 ‘예금을 깨고 주식을 샀다’기보다 자산가격 상승과 실제 자금 유입이 맞물리면서 포트폴리오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왜 지금 움직였을까…수익률보다 먼저 바뀐 것은 ‘투자할 수 있는 구조’

일본 가계의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NISA(Nippon Individual Savings Account)입니다. 일본은 2024년부터 개인 비과세 투자제도인 NISA를 대폭 개편했습니다. 장기간 투자할 수 있는 비과세 계좌의 틀을 넓히면서 가계가 주식과 펀드에 투자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강화했습니다.

일본 금융청은 현재 18세 이상 국민 약 25%가 NISA 계좌를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가계의 주식·투자신탁 보유액은 신NISA 시행 직전인 2023년 12월 말과 비교해 올해 6월 말 73% 증가했습니다. 물론 이 증가분에는 주가와 환율 변화도 포함되어 있어 이를 전부 NISA 효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세제 혜택을 갖춘 장기투자 계좌가 투자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결국 신NISA가 만든 변화는 가계가 장기투자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 자체를 넓혔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금과 보험은 필요 없어졌을까

일본의 변화를 단순히 ‘저축에서 투자로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금과 보험, 연금, 주식은 애초에 맡고 있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활비나 가까운 시기에 사용해야 할 자금에는 유동성이 필요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나 질병처럼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은 보험의 영역입니다. 반면 은퇴까지 10년, 20년 이상 남아 있는 자금이라면 물가 상승과 긴 투자기간까지 고려한 운용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금의 사용 시점에 따라 자산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은퇴 직후 사용할 생활비까지 주식에 투자한다면 시장이 크게 하락했을 때 필요한 돈을 손실 상태에서 꺼내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20년 뒤 사용할 자금까지 모두 현금성 자산으로만 보유하면 장기간의 물가상승과 자산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연금자산을 운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한가, 위험한가’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놓기보다 언제 사용할 돈인지, 얼마나 오래 운용할 수 있는지, 어떤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함께 따져야 합니다.

 

일본의 변화는 노후자산을 단순히 저축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은퇴 이후에는 자산을 한 번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나눠 써야 합니다. 당장 필요한 생활비부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비할 자금도 필요합니다. 반면 먼 미래에 사용할 돈은 물가와 긴 은퇴기간을 고려하여 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노후자산을 관리할 때는 ‘예금이냐 주식이냐’를 따지기보다 내가 이 돈을 언제 쓸 것인지, 얼마나 오래 남겨둘 것인지, 그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변동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주식·투자신탁과 보험·연금의 순위가 뒤집힌 것 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장수사회에서는 자산을 얼마나 많이 모았는지만큼, 축적해둔 자산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도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각자에게 해야 할 질문은 하나입니다. ‘내 노후자산은 사용 시점과 목적에 맞게 나뉘어 운용되고 있는가.’

 

홍태준 기자askhongpt@gmail.com

저작권자 © 연금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